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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 아트 오브 큐레이션

 

지난 2016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계의 인물로 꼽힌 바 있는 - 이는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한다 -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말하는 큐레이팅에 대한 글을 아래에 옮겨봤다. 한국에는 그의 <큐레이팅의 역사>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고, 얼마 전 일민미술관에서 선보였던 ‘Do it, 2017 Seoul’ 전시가 있다.

 

훌륭한 예술가 뒤에는 위대한 큐레이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슈퍼스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그의 기술의 즐거움과 위험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내 어린 시절의 영웅 중 한 명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였다. 그는 춤을 추지 않았다. 그는 안무가가 아니었다. 그는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지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작가 JG 발라드(JG Ballard)가 인터뷰에서 나에게 말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연결점 메이커(junction-maker)였다. 디아길레프는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창립자였다. 그는 스트라빈스키(Stravinsky)를 안무가, 피카소, 브라크(Braque) 및 꼭토(Cocteau)와 함께 하도록 했다. 그는 미술을 연극을 만나고 무용과 만나게 했다.

디아길레프와 꼭토는 에토네 므와(Etonnez moi!)”라는 말로 그들이 한 일을 설명하려고 했다. 나를 놀라게 해라. 나는 결코 예술 실천을 해본 적이 없으며 큐레이터가 예술가와 창의적인 경쟁자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큐레이터가 되었을 때, 나는 예술가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는 나의 일을 촉매제(catalyst)와 스파링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큐레이터의 어원학에 대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라틴어 ‘curare’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고, 돌보는 것(take care)을 의미한다. 로마 시대에 그것은 목욕탕을 돌보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 시대에는 영혼을 돌보는 사제(priest)를 가리켰다. 나중에, 18세기에 와서 그것은 예술과 공예품의 수집을 돌보는 것을 의미했다.

현대 큐레이팅에는 그러한 모든 것들의 유물이 있다. 스위스 장크트갈렌(St Gallen)에 있는 내 아파트의 부엌에서 아티스트 피슐리/바이스(Fischli/Weiss)(스위스 듀오 피터 피슐리Peter Fischli와 데이비드 바이스David Weiss), 리처드 웬트워스(Richard Wentworth),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한스 피터 펠드만(Hans Peter Feldmann)과의 첫 번째 전시회를 기획했을 때 - 나는 나의 부모와 생산적인 오해가 있었다. 부모님은 큐레이팅(curating)이 돌보는 것(caring)을 의미하기 때문에 내가 의학에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것이 예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직업으로서 큐레이팅은 적어도 네 가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예술의 유산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로운 작업의 셀렉터를 의미한다. 그것은 예술사에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업을 디스플레이하거나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1800년 이전에는 전시회에 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매년 수억 명의 사람들이 방문한다. 그것은 대중 매체이자 제의이다. 큐레이터는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s)이나 공간화된(spatialised) 책이 아닌 특별한 경험이 되도록 그것을 설치한다.

나는 10살 또는 11살 때 스위스에서 전시회에 가기 시작했다. 모범생으로서, 나는 매일 오후 자코메티(Giacometti)의 길고 얇은 인물을 보러 갈 것이다. 나는 그저 보고 볼 것이다. 시각예술가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가 내게 말했듯이, “예술과 함께한다는 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전부이다.” 그러나 내가 큐레이팅에 관해 가지고 있었던 첫 번째 에피파니(epiphany)1983년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Der Hang zum Gesamtkunstwerk’(The Tendency Towards the Total Work of Art, 총체예술 작품을 향한 경향)을 보았을 때였다. 제만은 도구 상자(toolbox)로서의 전시 혹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처럼 지식의 고고학(archaeology of knowledge)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제만이 가우디(Gaudi), 보이스(Beuys), 슈비터스(Schwitters), 그리고 다른 이들의 작업을 전시한 방식이었다. , 이러한 예술가들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것이 그 아이디어였다. 나는 그 전시를 41번이나 보러 갔다.

나중에, 나는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1985년 파리의 퐁피두(Pompidou)에서 개최한 비물질적인 것들(Les Immatériaux)’ 전시를 큐레이팅 한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 그 전시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인간의 조건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해 다루었지만, 내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리오타르가 자신의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전시의 미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를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생산하기(producing) 때문에 기술하기 어렵지만, 나중에 필자와 함께 작업한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와 같은 많은 다른 예술가들과 내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큐레이팅에 대한 위험이 있다. 총체예술작품(Gesamtkunstwerk) 전시는 예술가보다는 큐레이터의 총체예술작품이 된 위험 때문에 매우 조밀하고 매우 고무적이며 흥미롭다. 그러나 내게는 예술가들과 가까워지고 그들이 큐레이터의 비전에 종속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큐레이터의 역할이 가능하게 하는 자(enabler)의 역할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탈리아의 개념예술가(conteptual artist)인 보에티(Boetti)는 내게 예술가의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가장 까다로운 프로젝트를 실현하지 못했다. 나의 역할은 그들을 돕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시 중 하나는 ‘Do It’이다. 나는 21년 전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와 베르트랑 라비에(Bertrand Lavier)와 공동 큐레이터였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아르헨티나에서 그의 여동생에게 지시문을 보내어 그의 레디메이드 중 하나와 존 케이지(John Cage)의 우연 음악, 그리고 오노 요코(Yoko Ono)의 작업을 모으도록 한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갤러리나 다른 곳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하도록 지시문을 작성하는 데 기여했다. 120개가 넘는 도시에서 진행되었는데, 종종 현대 미술 현장이 별로 없는 곳까지 갔다. 지금은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 한다. 그것은 앞으로 100년 동안 계속될 수 있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는 예술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큐레이팅의 개념을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시는 갤러리에서만 열리지 않아도 되고 오브제를 보여줄 필요도 없다. 예술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는 곳에 나타날 수 있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ies)의 공동 감독이다. 사진은 ‘One of my favourites’‘Do it’ 전시의 일부인 애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의 더 허밍 룸(The Humming Room). (링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