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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ing off

크리스토퍼 놀란, 덩케르크에 관해 쓰다: ‘헤드셋 없는 가상현실’

 

'다크나이트' 재개봉 소식이 들리는가 싶더니 '덩케르크'가 먼저인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르는 격이니 놀란 감독의 팬이라면 그 어느쪽이든 좋겠지. 어쨌든 아래는 “Spitfires, flotillas of boats, rough seas and 1,000 extras: Christopher Nolan on the making of Dunkirk, his most challenging film to date”라는 제목으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이 그의 가장 도전적인 영화라고 하는 덩케르크(Dunkirt)’의 제작에 관해 직접 쓴 글을 일부 옮긴 것이다.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글이니 스포 걱정은 아마도 없을...)

 

 

많은 영국인에 있어서, ‘덩케르크는 그 신화적이고 거의 동화 같은 형태로 함께 자란 이야기이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나와 내 뼈 안에 있었다. 20년 전, 내 첫 번째 영화 미행(Following)’의 제작 도중, 나의 프로듀서 (그리고 미래의 아내) 엠마 토마스(Emma Thomas)와 나는 친구와 함께 그의 작은 항해용 보트를 타고서, 탈출이 일어난 거의 같은 시기에 덩케르트로 가는 해협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나는 항해를 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내륙 수로였기에 해협은 약간의 충격이었다. 날씨가 매우 나빴다. 바다는 매우 거칠었고, 횡단은 소요되었어야 하는 시간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우리는 19시간의 항해 후 한밤중에 덩케르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는 전쟁터에 간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동화가 아닌, 덩케르크의 현실에 대해 완전히 다른 존경의 차원과 함께 그곳을 떠나왔다 

실제로 무엇이 그곳에 투여되었는지 알게 될수록, 해협에서 더 많이 항해하거나 덩케르크의 해변에 서서 그것이 얼마나 평평하고 넓은지를 볼수록, 실제로 일어난 일의 지형과 그 물질성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고,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현대 영화에서 다뤄진 적이 없으며, 레슬리 노먼(Leslie Norman)[존 밀스 John Mills와 리처드 애튼버러 Richard Attenborough가 출연한] 흑백 버전을 만들었던 1950년대 이후로도 그렇지 못했다.

한 가지 이유는 거대한 스케일로 묘사될 필요가 있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며 상당한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나온다. 스튜디오는 미국인에 관한 영화에 관심이 있고, 거기에는 관여된 미국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스튜디오에서 충분한 신뢰를 얻을 때까지, 미국의 자본을 갖고서도 그들이 내게 영국 영화로서 만들게 할 때까지, 이 주제를 시험해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얻은 기회이자 내가 취한 기회이다.

나는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 쓴 책을 읽게 되었다. 많은 글이 제국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에 수집되어 있었다. 역사학자 조슈아 레바인(Joshua Levine)덩케르크의 잊혀진 목소리(Forgotten Voices of Dunkirk)’라는 책을 집필했으며, 그가 역사 자문으로 왔다. 나는 그와 이야기할 시간을 보냈고, 그가 나를 위해 찾아줄 수 있는 자료를 읽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실제로 덩케르크의 참전 용사들과 이야기하는 영광을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그들은 90대의 나이였지만, 그들 중 일부는 고맙게도 우리에게 시간을 내주었다.

그들은 덩케르크 정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했다. 돕기 위해 도착한 작은 배들에 그 정신이 적용되었다고 생각했던 참전 용사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특히 주변을 지켜 다른 이들이 도망갈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고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들을 위한 프로파간다였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은 실제의 그 무엇이 아니라 처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른 해석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영화에서 취한 접근법이다. , 관개에게 그들이 피난의 국면을 보고 있다고 제안하려 하지만, 무수한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 해변에 대략 40만 명의 사람들 - 가운데 당신은 매우 급진적으로 다른 경험을 많이 발견한다. 당신은 질서를 발견하지만 또한 혼돈을 발견한다. 당신은 고귀함뿐만 아니라 비겁함 또한 발견한다.

나를 사로잡아 영화로 작업하게 된 이야기 중 하나는 한 참전용사가 마치 헤엄쳐 집에 돌아가듯이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본 것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들은 말 그대로 영국으로 돌아가거나 배를 향해 헤엄치려고 했던 건가요, 자살하는 것이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나는 옛날식이라고 치부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오늘날의 관객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내가 배제시킨 것은 즉각 상황의 정치에 봉착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것들을 지도에 밀어 넣는, 방 안의 장군이 없다. 우리는 처칠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적을 간신히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생존 이야기이다. 나는 캐릭터와 함께 경험을 해나가길 원했다.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에 대한 나의 승부수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관객을 스피트 파이어(Spitfire - 영국 주력 전투기)의 조종석에 넣고서 메서슈미트(Messerschmitts - 독일 전투기)와 난타전을 치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해변에 세워 파도를 마주하며 모래가 사방에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무서운 전쟁 지역으로 향하는 이 거대한 여정에서 파도를 타고 흔들리는 작은 민간 보트에 그들을 넣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헤드셋 없는 가상현실이다.

우리가 CG 레크리에이션을 사용하기보다는 당시와 가능한 한 가까운 시간대의 실제 배와 비행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너무너무 명백하다. 우리는 실제 비행기를 찾아서 서로 싸우며 비행하게 하고, 카메라와 배우를 비행기에 올려 보낸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현실적으로 이렇게 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의 과정에 도전하면서, 우리는 1940년에 사람들이 경험한 것에 비하면 우리의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다. 우리가 건너려고 하는 덩케르크 이면의 아이디어는 그것이 개인적인 영웅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 영웅주의(communal heroism)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작전에 필수적인 커다란 공동체 의식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독특하게 만드는 이유이며, 그것이 영국인에 있어서 재집결 지점으로 항상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는 또한 그것은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 생존을 위한 개별의 추동력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귀향의 절박감에 관한 근본적인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