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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ing off

홍상수, 김민희 칸 영화제 출품작 리뷰

 

*아래의 글은 홍상수 감독의 두 영화에 대한 리베라시옹(Liberation)’지에 실린 엘리자베스 프랑크-뒤마(Elisabeth Franck-Dumas)의 리뷰를 일부 옮긴 것이다.(liberation.fr)  

올해 한국에서는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그 후(Le Jour d’après)> 등 끝없이 과민한 심장의 새로운 감정적 바리에이션인 최소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사건은 이미 칸에 24시간의 간격을 두고 두 편의 걸작을 상영한 한 시네아스트로부터 도래했는가? 최근의 기억으로부터, 아니, 바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 영광의 타이틀이 홍상수 감독에게로 도래했고, 그의 훌륭한 연출은 몇 년 전부터 프레스티시모로(가장 빠르게) 집중된 메트로놈의 카덴차에 도달한다.(그가 2월 베를린에서 또한 매우 아름다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소개한 것을 상기해보자) 그의 영화들에서 작품의 반복과 변형의 모티브를 환기시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칸에서 중첩된 것 또한 코믹한 그 무엇이 있으며, 그런 만큼 그는 한국인을 통해 스크린에 연출된 영화감독의 인물들, 특히 소주를 마시며 보잘 것 없이 굴거나 찌질하게 질질 끌면서 상대의 환심을 사려고 끈적하게 굴거나 하면서 밤을 보내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과는 거리가 있다. 이와 같이 칸 영화제에 소개된 것이 일요일, 칸의 쉬케 거리에서 지난해 간신히 촬영된 그저 경탄스러운 69분의 <클레어의 카메라(Claire's Camera)>(특별 부문)와 월요일, 한국에서 2월에 촬영된 흑백의 애절한 멜로드라마 <그 후>(경쟁 부문)이다. 그 둘을 연이어 본다는 것은 손가락 사이로 한 작품의 두 측면, 태양과 같은 하나와 어두운 다른 하나를 붙든다는, 다른 것만큼 가벼운 하나가 비극적이라는 인상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만약 모든 것이 표면적으로 그 영화들을 떨어뜨려 놓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수많은 공통점들은 결국 일일이 열거하자면, 영화의 오컬트적인 힘, 혼돈과 세계의 분열을 결합하여 더욱 질서를 회복하려는, 갈짓자 행보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배후에 보이지 않으면서 그러한 환영을 조율했던 마법의 손에 관해 심사숙고하게 하는 그 형식적 힘의 승화된 표명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농담처럼 혹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시작한다. , 한 영화감독이 지방 도시에 오고, 그 지방 도시는 칸이다.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가 작년에 폴 버호벤(Paul Verhoeven) 감독의 <그녀(Elle)>의 프로모션을 위해 칸에 왔을 때를 이용해서,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홍상수 감독은 그곳에서 상대적으로 비밀리에 칸의 오랜 거리보다도 수원이나 통영의 거리의 구석에서 더 많이 보곤 하는 이 완벽한 틀을 구성했다. 스크린에는 쉬케의 작은 건물의 인터폰 위에 올려진 손가락 하나가 한편으로 할렐루야 모드로 인정과 감사의 전기적 방출을 일으키며, 홍상수 감독이 우리에게 영화를 상영하러 왔다. 물론 우리 프랑스인이 아니라 (그는 이미 10년 전에 파리에서 <밤과 낮(Night and Day)>을 상영했다.) 정확히 이 기적의 장르에 기대하면서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대거 공감하러 온 우리 시네필 말이다.

영화의 판매를 담당하는 만희(김민희)는 페스티벌에 와서 사장(장미희 분)에 의해 비열하게 해고된다. 이 최신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 소원수(정진영 분)도 그곳에 와서 테라스에 맥주를 내려놓으면서 여성 혐오에 부들부들 떠는 호인이다. 그리고 이제 음악 교사인 클레어(이자벨 위페르)가 귀여운 모자와 노란 가디건, 멜빵 차림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사진 찍으러 온다. “칸에 온 게 처음이야.”라고 첫 등장에서 그녀는 외친다. 적절하게 순진하고 어리둥절한 톤에 상영관에 웃음이 터진다. 말하자면 위페르는 자신의 놀라운 역할에 시종일관 완벽하며, 우리 각자에게서 예술가를 보기를 원하고, 당연히 옳다. 그리고 거기서 또 다시 <다른 나라에서(In Another Country)> 이후 이 두 거장의 협력의 결과로 의기소침의 상태를 넘어서 최고의 것을 끌어내며, 그와 함께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렇게 잘 표현되지 않을 코믹한 재능과 함께 두 번째 역할을 해내게 된 것 같다.

두 번째

영화는 일련의 계시들로 정돈되어 있고, 단어의 대위법을 연주하도록 하는 게 필요한데, 그 이유는 결과가 주체의 눈에 나타나도록 클레어가 클리셰들을 취하고 그것들을 뒤흔듦에 따라, 이야기를 재건하게 되는 진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해고당한 불의를 반추하는 만희에 의해 끊긴 조직의 부분들을 분노하면서 다시 짜맞춰보고 그렇게 하면서 영화를 구성한다. “사물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두 번, 아주 천천히 바라보는 것이에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영화는 이러한 기적을 실현시킬 수 있으며,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과 구분된 지식에 덧붙여진 <클레어의 카메라><그 후>의 변화된 시각은 내밀한 폭발의 섬광들을 자신의 영화 속에 당당하게 접합시킨 한 시네아스트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한다. 굉장한 영화인 <그 후> 역시 계시자의 인물을 포함하는데, 영화에 넘쳐흐르는 가장 아름다운 독창적 발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중략)

파멸된 인연의 한탄스런 후렴구를 통해 리듬을 이루는 흑백의 애가로 물든 <그 후>는 봉완의 시점을 둘러싸고 짜여지기 시작한다. 영화의 첫 부분은 관객에게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는 흐름 속에서 표현되는 주관성으로 채색된 징후들의 울창한 숲이며, 이는 특히 한국인에게 중시되는 이러한 마주침의 시기에 여성 인물들의 왈츠를 뒤섞는 거의 동일한 계획의 재연으로 이뤄진다. 혼란스러움을 재구성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더구나 밤에 자기 건물 밑에서 방황하는 외로운 봉완 같은 이의 흐느낌이 폭발하는 전대미문의 날카로운 소리로 뒤흔들리는 존재에게 내재된 복잡함을 표현하는 한 방식일 따름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 서서히 알아차릴 수 없이 이야기를 조직하는 시선이 봉완에서 아름으로 옮아간다. 그리고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결국 그녀는 사연으로 가득 찬 자신의 직감을 털어놓기에 이르러, 여기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언어 및 신체 폭력, 여성 혐오, 비굴함에 곤두선 관객들의 암묵적 항의 또한 떠맡으면서 구원의 숭고함을 그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파괴 그 자체는 각자에게 잠들어 있는 예상 밖의 악을 솟구치게 하는 데서 비롯된다.

반향

영화의 서사적 창의성은 아름이 여기서 절망적인 봉완 같은 이와 마주하여 서서히 증대되는 모순을 지니는 만큼,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고, 모든 게 놀라워.”라고 하는 만큼 날카롭다. 아름은 현실을 포착하는 말의 힘을 믿으며, 우리가 영화감독의 인물과 너무나 빠르게 동일시해버리게 되는 봉완은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말 속에서 앞서 언급한 클레어의 그것에 대한 반향을 듣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 당당한 프레스코화가 시도하는 것이 꿈꾸는 것과 사실로 확인된 것 사이의, 되고자 했던 것과 실제인 것 사이의 해결할 수 없는 방정식의 행위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뭔가를 믿어야 해요. 두드려요, 아름. 나는 모든 순간에 죽을 수 있으리라 믿고, 이 세상을 믿어요!” 또 다시 잠시 스크린이 검게 변할 것이고, 아름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을 믿고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홍상수 감독의 꿈꾸는 세상, 그것을 믿으며, 이는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에 대한 하나의 겸손한 정의... (하략)

ps) 마지막의 질문에 대한 의미 부여를 이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시네필의 감성을 많이 드러내는 글이지 않나 싶다. 아마도 두 번째로 상영한 영화에서 수상 가능성을 내다보는 듯한 언급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