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picing up

'힘쎈' 도봉순과 '역적' 홍길동, 영웅 판타지 권하는 요즘

 

 

우연치 않게 괴력의 소유자인 힘쎈 여자도봉순(박보영 분)과 전설의 아기장수라는 홍길동(윤균상 분) 이야기가 겹쳐서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들 이런 인물들이 판타지란 걸 안다. 한데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 등장하는 연산군도 궁금해 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영웅 캐릭터를 소환할까?

판타지가 드러내는 것은 현실의 결핍이다. <힘쎈 여자 도봉순>만 보더라도, 도봉구에서 벌어지는 여성 연쇄 살인사건이 다뤄진다. 이러한 종류의 사건이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여혐이 논란거리가 되는 요즘 여성 슈퍼히어로의 등장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정말 이렇게라도 여자라고 무시당하지도 위협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렇다고 원더우먼처럼 이상적인 타입이 아닌, 흔히 보는 귀엽고도 허술하며 취업 걱정하는 평범녀이다. 그래, 이런 어마무시하고 비현실적인 힘이 된장녀나 김치녀에 주어질 수는 없지. 이 또한 판타지고 미천한 데서 출현한다는 전형적인 아기장수형 서사의 여자 버전이고 현대형 버전이랄까. 그래야 약자를 대변하는 데 설득력이 생긴다는 것일까.

 

 

어쨌든 그들의 특별함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에게도 불편하거나(도봉순), 사회 내에서 위험해질까봐 그 힘을 숨기다가 잃어버리기도 한다.(홍길동) 또한 괴력을 상황에 맞게 조절하는 법을 배우거나 어떤 일련의 각성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도봉순의 경우, 이제 홍길동이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 반역의 기질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아이러니하게도 남자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로맨스 서사를 또 다시 요구하는 차이가 있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갑질하는 양반의 횡포이다. 그것도 그냥 체면치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잔혹 버전 수준이다. 서자가 장자에 앞서 걷는다는 이유로 발뒤꿈치를 잘라버리거나, 노비가 글 배우기를 원한다고 눈을 찌르거나, 여인의 일곱 가지 법도를 어겼다고 해서 혀를 잘라내거나 등등... <행록>에 나타난 이러한 디테일은 판타지를 더욱 강화하는 장치이기도 하겠지만, 이와 함께 땅콩 회항에서부터 심지어 잠시 머문 공관의 변기까지 갈게 하거나 보좌관에게 장보기까지 시킨 에피소드 등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스쳐가는 것도 사실이다.

연산군의 광기가 극에 달할수록 이러한 영웅이 백성을 거두어주기를 더욱 바라게 될 수밖에. 묘하게 현실의 사태를 물고 들어가며 드라마의 추이를 지켜보게 되는 요즘이다. (관련: 영웅신화를 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