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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마크롱, 전 대통령들의 39세는 어땠나? 노무현, 문재인은?

프랑스 대통령들: 드골,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탕, 미테랑, 시락, 사르코지, 올랑드, 마크롱 (출처 DSK / AFP)

엘리제궁에 입성한 30대라니, 꽤 이례적인 일이고 프랑스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라 그런지, 이런 기사까지 나온다. 프랑스의 이전 대통령들은 마크롱이 대통령이 된 그 나이에 도대체 뭘 했을까 말이다. 그냥 지나치기는 왠지 좀 아까워서 아래에 내용을 정리해봤다.

57일 일요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은 겨우 39세이다. 그는 1799년 당시 30세였던 첫 번째 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의 조카, 1848년 당시 40세에 대통령에 선출되었던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Napoleon Bonaparte)의 사이에 자리한, 프랑스 공화국 출범 이래 가장 젊은 두 번째 지도자이다. 그 외엔 없었다!

확실히 나이가 정치적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이전의 공화국 대통령들이 그와 같은 나이인 39세에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봤다. 에마뉘엘 마크롱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드골, 군 사령관

샤를 드골은 1929년에 39세였다. 그는 1920년부터 프랑스 위임통치 하의 베이루트에서 군 사령관에 막 임명되던 참이었다. 이때의 경험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는 근동의 국가들의 수호 임무를 받아들여, 특별히 이곳에서의 역사적 역할로 인해 이 과업을 수행할 자격이 있다.” 불과 2년 후 그가 파리에 돌아온 당시에 발견하게 될 국가의 업무와는 거리가 있었다.

퐁피두, 청원의 마스터

조르주 퐁피두(George Pompidou), 1950년에 39세였던 그 역시 정치적 삶의 한 가운데에 진입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드골 장군의 가까운 고문으로, 참사원(Conseil d'État - 행정재판의 최종심, 정부 법안의 입안 등 담당)에서 많은 청원을 했으나 아직 어떤 선출직도 맡지 않았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재무장관

한편 다음 대통령들에 있어서는, 국립영상원(INA, Institut national de l'audiovisuel)의 아카이브와 정치 분야에서 일부 흔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1965년 경영박람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수입국이었고 이는 완전히 비정상적이다. 우리의 산업 및 기술 개발 정도를 가진 나라가 일상용품을 수입할 이유가 없다. 양방향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은 정상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수출을 더 해야 한다.”

흔히 에마뉘엘 마크롱이 겉보기에 젊고 안으로는 나이 들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지스카르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39세에 그는 젊은 현대인의 이미지를 반영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매우 신중한 방식으로 말한다. 이때 지스카르는 이미 10년 가까이 의원직에 있었고, 퐁피두 정부의 재무장관과 경제부장관을 역임했다. 따라서 많은 경험을 가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미테랑, UDSR 의장

프랑수아 미테랑은 39세 때 민주사회주의 항전동맹(UDSR, l’Union démocratique et socialiste de la Résistance)의 의장이었다. “선거운동 18일째, 대도시의 37개 지구를 대표하는 UDSR의 후보들은 이미 우리가 싸우는 이유를 규정했다.”라고 1955년에 선포했다.

수십 년이 넘게 의원직에 있었던 그는 1947년부터 여러 번 장관직을 맡았다. 전쟁참전용사장관, 해외령장관, 내무장관(1956년에는 법무장관이 될 것이다) 등을 포함한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제4 공화국의 정치 세계에 이미 잘 녹아든 모습을 본다.

시라크, 장관이자 의장

1971, 자크 시라크는 코레즈(Corréze) 지방의 총의회 의장이었고, 같은 지역의 전 의원, 전 국무장관이었으며, 그리고 자크 샤방-델마(Jacques Chaban-Delmas) 내각에서 의회관계담당장관을 막 역임했다. 엘리제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직 24년이 더 필요했다. 확실히 그만큼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나온 인터뷰에서, 그는 이미 조급했다.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의회관계담당장관을 맡은 이후로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썼다.” 자크 시라크의 답은 이러했다. “너무 많다기자는 그에게 일 중독자가 맞는지, 매일 밤새워 일하는지 물었다. 시라크는 말하기를, “알다시피, 이런 면에서 과장이 많다. 파리의 계획이고 코레즈의 계획인 한 모두 내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사르코지, 시장이자 발라뒤르 내각 대변인

1994년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뇌이유(Neuilly)시의 시장이자 의원, 예산장관, 에두아르 발라뒤르(Edouard Balladur) 정부의 대변인이었던 그는 이미 저녁 8시 뉴스에 초청되기도 했다. “만약 당신이 오늘 내게 제기한 질문이 이기기에 가장 좋은 질문인가?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 각자가 나처럼 말할 수 있다. ‘에두아르 발라뒤르, 이 문제가 내일도 계속될 것인가? 두고 보겠다.’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당파성에 동기부여 되지 않는다. 나는 우파의 애국심이 완전히 엇나갔다고 생각한다.”

에두아르 발라뒤르의 대변인인 그는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도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에게 정치적 삶에의 참여를 반영하는 사막의 교차점을 열어주게 된다.

올랑드, 코레즈 지방 의원

니콜라 사르코지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199339세를 맞이했다. 비록 1981년 이래로 사회당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를 위한 임무는 거의 없었다. 그는 당시 코레즈 지방의 의원이었으며, 1995년 대선을 목표로 하는 미셸 로카르(Michel Rocard) 측근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한 말은 이러했다. “328일부터 미셸 로카르의 발의에 콘텐츠를 부여해야 한다. ,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나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운동의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 및 심화의 차원에서의 콘텐츠이다.” 역사는 그에게 이유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에마뉘엘 마크롱은 전형적이지 않은 과정으로 대통령이 된 것처럼 보인다. 놀라운 것은 그의 정치적 참여의 시작과 당선 사이에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샤를 드골과 조르주 퐁피두 외에 다른 모든 대통령들은 엘리제궁에 도달하기 이전에 수많은 세월의 정치적 삶을 뒤로 하고 있었으며, 정치란 많은 것을 요구하는 직업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준다. 몇 주 전에, 에마뉘엘 마크롱은 이렇게 확신했다. “20년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럴 것인가? 미래가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다.(francetvinfo.fr 참고)

추신, 그럼 39세의 나이에 우리의 대통령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일부 걸리는 내용을 보자면, 고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39세 때 부림사건의 변호로 인연을 맺은 장상훈 씨의 주례를 섰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다들 예측하고 있듯이 이번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1992년쯤 되는 시기일 텐데, 인권변호사로서의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6월 항쟁을 통해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노무현과 함께 국회의원 공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노무현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서 당선, 13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하였지만, 문재인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재야에 남은 문재인은 꾸준히 젊은 변호사들을 영입하여 법률사무소 이름을 '법무법인 부산'으로 바꾸고 대표 변호사를 지냈다."(나무위키 참조)

2002년 노무현 캠프 부산 본부 선거 대책위원장을 맡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부산 지부와 경남 지부장을 역임하며 꾸준히 시민사회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