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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ing off

하이라이트, 까르띠에 소장품전, 데이비드 린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소개되고 있는 ‘하이라이트’ 전시가 흥미롭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독창적인 커미션 작품을 접할 수 있다. 현대미술 작가들 외에도 패티 스미스 같은 뮤지션이나 기타노 다케시, 데이비드 린치 등 영화감독의 작업도 포함되어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마침 최근에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의 창작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감독의 메모가 담긴 ‘빨간방’을 집어 들었던 터라, 유독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초현실적이고 악몽 같은 이미지가 가득한 그의 영화를 보고 난감해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걸 같이 보면 아무래도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 않다. 이 책의 원제는 ‘Catching the big fish’, 그러니까 ‘큰 물고기 잡기’인데, 그는 아이디어를 물고기에 비유하고 있다.

“아이디어는 물고기와 같다.

작은 물고기를 잡고자 한다면 얕은 물에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큰 물고기를 잡으려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깊은 곳에 있는 물고기는 더 힘세고 더 순수하다. 그놈들은 덩치가 크고 심원하며 아주 아름답다.

난 내게 중요한 물고기를 찾는다. 영화로 옮길 수 있는 물고기. 그런데 저 깊은 곳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한두 종류가 아니다. 사업에 필요한 물고기도 있고, 스포츠에 적합한 물고기도 있다. 모든 것에 필요한 제각각의 물고기들.

대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다. 현대 물리학은 그곳을 ‘통일장(the United Field)’라고 부른다. 당신은 의식을 확장하면 할수록 그 원천을 향해 더 깊이 내려갈 수 있고, 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초월명상법을 30년 넘게 수행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내게 그것은 큰 물고기를 찾아 좀 더 깊은 곳으로 잠수하게 해주는 방법이었다.” 이걸 염두에 두고 보면 그의 영화를 아무리 신경 곤두세우고 본다 한들 제대로 건지지 못하는 게 당연해보이기도 한다.

전시를 보니 린치는 온갖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할까. 냅킨에다가도, 혹은 포스트잇에다가도, 틈만 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어떻게든 붙들어놓고 있었던 것들을 전시에서 보여준다. 어떤 것들은 컬트영화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이레이저 헤드’에 나오는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살덩어리 같은 형태로 먹물이 번지는 타입의 드로잉을 품고 있다.

“‘이레이저 헤드’는 내 영화 가운데 가장 탈속적인 영화다. 이런 내 생각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이레이저 헤드’는 어떤 방향으로 자라나고 있었지만, 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영화의 시퀀스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일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체를 하나로 묶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는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한 문장과 마주치게 됐다. 난 성경을 즉시 덮었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한 문장에서 그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전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비전의 실현이었다.

그 문장이 무엇인지는 아마도 내 평생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알고 싶지만, 어쩌면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것이 더 이상 아닌 무엇과 관련된 것이 아닐는지. 일종의 ‘기관 없는 신체’ 같은 무엇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 이게 알고 보니 공포영화라고만 생각했던 선입견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게 된다.

그런데 한국어 제목인 ‘빨간방’은 뭘까. 알고 보니 그것은 영화 ‘트윈 픽스(Twin Peaks)’의 작업 도중에 있었던 일이다.

“저녁 6시 30분쯤 그날치 일을 마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한 승용차의 지붕에 손을 얹고 기대서 있었는데, 차의 지붕이 매우 따뜻했다. 뜨거운 것이 아니라 아주 기분 좋게 따뜻했다. 그렇게 기대는 동안 ‘팍’하고 빨간방 - ‘트윈 픽스’에 나오는 빨간색으로 치장된 기묘한 느낌의 방 - 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전의 일과 대사의 일부도 떠올랐다.

이렇게 아이디어와 몇몇 조각을 얻었고, 이것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바로 일이 시작되는 방식이다.”

아직 보지 못한 ‘트윈 픽스’를 조만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영화를 ‘인랜드 엠파이어’ 이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또 다른 작품 소식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