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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와 잃어버린 얼굴

엘비 2015. 9. 16. 01:41

 

 

요즘 명성왕후를 다룬 두 가지 버전의 뮤지컬이 한꺼번에 무대에 올랐다. 하나는 20주년을 맞이한 관록의 뮤지컬 <명성왕후>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예술단의 <잃어버린 얼굴>이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와 CJ토월극장에서 각각 사이좋게(?) 올라가고 있던 게 바로 며칠 전이다. 어쨌든 이런 현상을 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양의 해, 을미년이다. 지금으로부터 육십갑자 두 번을 거슬러 가면 바로 1895년 을미사변이 있던 해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두 버전은 서로 다른 명성왕후를 그리고 있다. 뮤지컬 <명성왕후>는 초연 때 봤던 기억이 난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이 버전은 장면장면마다 그동안 봐왔던 다른 뮤지컬들을 소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미스사이공>이니 <레미제라블>이니 하는 주요 뮤지컬들을 국내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마침 <명성왕후> 직전 런던 웨스트엔드를 훑었던 효과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더라도, 뮤지컬에서 중요한 게 음악인데, 나름 연구해서 애쓴 무대연출에 비해 미치지 못했다고 여겨졌고, 아니나다를까 이후 음악을 업그레이드한다더라 하는 얘기가 들렸는데, 이후는 보질 못했다. 어쨌든 국모의 이미지와 그를 무참히 짓밟는 침략자와의 대립 구도는 전형적이었다.

이번 서울예술단의 버전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구도가 없지 않지만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근대의 도래와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기묘하게 맞물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진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꽤 중층적으로 명성왕후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사진이 찍히면 영혼을 빼앗긴다며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는 인디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는 명성왕후와 그의 복장으로 사진 찍혔다는 이유로 희생 당하는 궁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시대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한다. 더구나 근대화의 물결 가운데 하나 둘씩 사라진 이들을 무녀의 힘을 빌어 소환하며 마치 씻김굿처럼 왕후의 심리를 위무할 때, 이 작품이 어쩌면 무대를 뛰어넘는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시간들이 혼재하는 이미지랄까. 만약 영화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파편적인 과거 이미지가 현재에 박혀오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새롭게 영상으로 만들어져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무대는, 더구나 뮤지컬 무대는 아무래도 이러한 이미지들의 시간 여행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소 역사 교과서 같은 전반부나 극적 효과를 위한 것이겠지만 궁녀로 들어가는 여자 아이와 사진사의 로맨스 같은 건 다소 번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좀 더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집중도 있게 그려지지 못했다는 점이 있지만, 후반부에서는 실마리가 풀리긴 한다. 어쨌든 이러한 부분들 역시 영상으로는 좀 더 적절히 연출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뮤지컬이라는 형식이 대본의 섬세함을 제대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