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연과 애의 결합?
연(戀)
생각할 련, 그리워할 련, 그릴 련
애(愛)
사랑 애
연애에서 연(戀)과 애(愛)는 약간 다른 의미의 글자들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연'은 말 그대로 반해서 빠져드는, 'fall in love with someone'의 단계이고, '애'는 그 이후에 쌓아나가는 'relationship'을 얘기한다는 것이다. 하긴, 새삼스럽지만 영어에서도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과 사귄다는 것은 별도로 표현되는 것이던가.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굳이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얘기는 프루스트 관련 책을 보다가 나온 얘기여서 굳이 들먹이지 않을 수 없겠다. 어쨌든 프루스트가 말하는 사랑은 거의 전자에 국한되는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해, 질투와 거짓말의 법칙으로 점철되는 프루스트의 사랑이 과연 사랑이냐는 것이다. 빠져들고 매혹되는 그러한 단계가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그런 양상을 보고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연'과 '애'에서 전자만 놓고 사랑이라고 치는 셈인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후자에 가깝지 않느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얼핏, 아주 예전에 들었던 강신주 선생의 얘기가 떠올랐다. 물론 이건 선생이 지금처럼 뜨기 전의 일이고, 어쩌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예기치 않은 '기호'의 충격과 그것에 이끌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프루스트와 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그것은 프루스트의 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불꽃놀이 단계에서 바스러져버리는 그의 사랑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앙드레 지드를 언급했다. 즉, 연에서 애의 단계로 나아가는 사랑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지드가 훨씬 깊이가 있다고 했다.
이건 어느 재일교포에게 들은 건데, 일본어에서 '연'과 '애'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고 했다. 지칭하는 동사도 다르다고 한다. 그러한 구분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현상적으로 그러한 분리가 가능할까 싶은 의구심도 한편으로 들었다. 하긴, 프루스트는 그렇게 분리시키지 않았던가. 프루스트 관련 책에서 군데군데 봤던 일본 종이접기, 오리가미 얘기가 왠지 심상치 않아보이지만 그저 심증에 불과하다. 일본에 영향 받아서 그런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는 추론은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다 그런 사고방식을 지닌다는 일반화 역시 얼마나 성급한가.
마침, 이성복이 쓴 에세이의 제목이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이다. 이렇게 해서 흩어진 파편들의 퍼즐놀이는 시작되는 것이다.